율리우스 카이사르 브리튼 침공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국 침공은 갈리아 전쟁 중인 기원전 55년에서 기원전 54년 사이 두 번째 영국 침공이었다. 첫 번째 침공에서 카이사르는 2개 부대를 직접 지휘했고 두 번째 침공에서 628척의 배를 동원, 5개 부대와 2천 명의 기병을 배치하여 켄트의 영국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시저는 내륙부로 나아가 템스 강을 건너 영국전의 지휘관 카시벨라우누스를 꺾고 만두블라스를 정복왕에게 정복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의 일부로서 영국을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싸움에서 승리한 시저는 영국의 혹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적절한 이유를 만들어 냈고 곧 갈리아로 후퇴하였습니다. 로마 국내에서도 침략의 결과에 대한 평가가 분분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영국은 로마에 알려지게 되었고, 100년 후의 로마에 의한 영국 정복까지 영국과 로마의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이전의 브리튼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고전 시대에는 영국은 이미 주석의 발상지로서 알려져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 피테이스는 기원전 4세기에 영국 연안을 탐험했고, 기원전 5세기 초 카르타고의 항해사 히밀코가 북유럽 연안을 탐험했을 때 영국은 고대 세계에도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조차도 영국은 세계의 끝에서 바다를 가른 미지의 섬이었으며 로마의 기록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피세아스의 항해를 그럴듯한 이야기로 간주를 하였습니다.
시저 시대에는 영국은 철기 시대의 문화를 가졌으며, 인구는 100만 명에서 400만 명이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로는 경제 활동은 저지와 고지로 크게 나뉘었다. 저지대의 동남부 지역은 비옥한 토양으로 농작물을 개발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대 교역로를 확립시켰습니다.
영국에서는 템스 강도 중요한 교역로였다. 한편 글로스터에서 링컨까지의 연산을 따라 목축지를 잠재시킬 수 있는 지역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지에서의 농업은 어려웠습니다. 북부 고지에서의 정착촌은 주로 구릉의 요새화와 그 주위의 무리 이용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남동부의 저지대에서 오피움 형태의 대규모 정착촌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들 저 지대 읍면에서는 강의 흐름을 이용한 무역이 중요한 경제적 요인이 되고 있엇습니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가 로마에 가입하기 전부터 영국은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맺어졌으며 이탈리아 반도 포도주는 현대 브르타뉴를 중심으로 한 중심으로 한 아무리 카 지역을 거쳐 두셋의 한 결점 트베리 만으로 수입됐습니다.
시저는 영국에 대해 북 갈리아의 벨게 이인이 월경하여 정착했으며 정치권력도 수에시오누스의 왕 데 비치야 코스를 떠올리며 갈리아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썼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쓰이던 통화는 기원전 100년경 갈리아 벨게이 통화가 유통되었고 기원전 150년경 갈리아 통화가 유통되었습니다.
그 후 돈은 두셋의 남해안까지 서쪽으로 쓰였고 즉 벨게이의 인구와 영향력이 대폭 증대된 것입니다.
첫 침공 (기원전 55년)
정찰과 계획
시저는 갈리아 전쟁 중에서 영국인들이 골 본토를 지원하고 그에 반대하기 위해서 영국 정착촌으로 도망친 벨게 이인들에게 가담한 침략 이유를 설명합니다. 영국과의 선박무역을 주도했던 아모리카의 베네치아인은 기원전 56년 영국인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스트라본은 카이사르가 베네치아인과 영국인 사이의 해상무역을 봉쇄한 것이 기원전 5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썼습니다. 이 상황에서 로마의 영국 정찰이 기록보다 더 빨리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기원전 55년 늦여름, 시저는 전쟁과 싸우기에는 너무 늦었음에도 영국을 정찰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영국 세관과 공통전략, 항만 상황 등에 대해 영국과 무역관계가 있는 매매자들을 불러들였으나 유익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해협 양안의 독점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저는 정찰을 위해 군함을 트리뷴 가이우스 볼세누스에게 할당했으며 하이트와 샌드위치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켄트 해안을 순찰했으나 경계가 좁아 착륙하지 못하자 5일 만에 카이사르로 돌아와 정보를 보고했습니다.
이때 영국인 중 한 명이 상인의 경고를 받고 토벌을 약속하는 대사를 파견했습니다. 시저는 정복을 돕기로 하고 동맹국 아트레바트왕 코미우스를 이들과 함께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침공
시저는 로마 군단의 제 7군단과 제 10군단을 현재의 부로 뉴슬레 메일에 살고 있던 마일로니 항에서 두 척의 수송선으로 나누어 함께 정상 아래 영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한편, 아마도 오늘날의 암브레츠 부근의 다른 항구에서 18척의 수송선이 기병과 말을 싣고 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배는 3중 또는 이단으로 유럽 서해안에 사는 베네치아인을 포함한 여러 해양부족의 기술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시저는 매우 급했지만 8월 23일 한밤중에 3차 정찰을 개시해 항구에 주둔지를 하나만 남겨뒀습니다.
포위무기를 갖지 않고 서둘러 진행한 작전은 나중에 전략적 실수로 남습니다. 시저는 이 작전으로 영국을 완전히 정복할 생각은 없었다.
상륙
카이사르는 원래 더 블리스에 착륙할 작정이었습니다. 현재의 도보인데 볼세노스가 착륙에 적합하다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또한 로마군의 이곳 상륙에 대비를 하여 언덕이나 도보의 백악기 벼랑에도 방위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공격을 피하고자 다른 장소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엇다.
시저는 정박하고 보급품을 실은 배가 함대에 합류하는 '9시'까지 바다에서 기다리다 약 7마일 떨어진 월 머 해안에 착륙했다. 그곳은 오늘날 역사적인 장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레스터대학 고고학자 팀은 카이사르의 착륙지로 켄트주 타니트 섬의 페그웰만을 추정하였다. 이는 당시 대규모 토목 현장이나 많은 공예품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도범만큼 착륙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대함대가 착륙을 시도할 경우 착륙 지점은 월 머에서 페그웰 만까지 1마일의 넓이가 될 수 있다.
영국군은 로마의 상륙에 따라 기병과 전차를 동원하였고 로마 배는 얕은 여울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수몰이 심했다. 병사들은 배를 내려야 했고 해안 앞바다에서의 공격을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시저는 독수리가 새겨진 아킬리퍼를 사용하여 착륙했다.
로마 배가 바리스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서 영국인을 견제하는 동안 병사들은 해안에 교도보를 설치했습니다. 바람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기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시저는 영국군을 격퇴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시저의 영국 침공은 그의 자신에 반하여 '익숙한 성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교두보
로마인들은 앞서 언급한 고고학적 발굴현장으로 알려진 착륙지점에 교두보를 설치하고 생포된 콜미우스와 영국인들에게 곧바로 인사하기 전에 미리 영국에 파견되었다. 시저는 갈리아 전쟁 때 영국인들이 로마의 자유민을 공격하고 영국 지도자들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협상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아직 도달하지 못한 기병대를 기다렸습니다.
기병을 태운 배는 교수에 접근했지만, 이제 막 시작된 폭풍우 때문에 갈리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협상이 결렬되고 특사는 다시 내륙으로 돌아왔다. 폭풍우로 항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지원 부대뿐만이 아니라 식료 공급에도 문제가 있었다.
지중해에서 태어난 자란 시저는 영국 최초의 폭풍우에 망연자실했다. 독에 들어간 전함이 침수되어 정박하고 있던 수송선이 충돌하여 손상을 입었다. 침몰한 배도 있고 안 쓰이게 된 배도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공복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동안에 영국인은 매복하여 로마군을 공격하여 식량을 손에 넣었습니다. 폭풍이 겨우 지나자 영국군은 대열을 재편성하여 로마군을 공격하였다. 한편 코미우스는 로마인과 싸우기 위해서 친로마파 영국인을 모았다.
로마군과 코미우스는 당시 로마군의 정책에 따라 인근의 영국인 정착촌을 파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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