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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카스티야 연합왕국 간단한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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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연합왕국

카스틸랴 연합왕국은 중세부터 현대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1230년 카스틸리아 왕 페르난ㄷ노 3세가 레온의 왕 위에 즉위하면서 탄생하였다. 18세기 초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승리한 펠리페 5세가 아르곤을 완전히 병합하면서 아르곤과 동방동맹은 근대 스페인 왕국의 기초를 닦았다.

카스티유는 계승전쟁 후에 정식으로 해산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스페인들뿐만 아니라 훗날 왕국 '에스파냐'라고 불렀습니다.

레온 왕구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후계 국이었으며, 카스티유는 건국 당시 레온 왕국 밑에 있던 영토였다. 10세기경 레옹은 일찍이 나바라 왕국에 의해 카스틸리우스를 빼았겼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르러 카스티유는 독립하여 독립하여 독립왕국이 되었다.

레옹과 카스틸랴는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두 번 영국을 형성했다. 1198년 카스틸랴 공주 베렌젤라는 사촌인 레온 왕 알폰소 9세와 결혼을 하여 이듬해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출산하였다. 1217년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에게, 1230년에 아버지 알폰소 9세가 죽었다.

그 후 양왕국은 동군의 연합으로서 카스틸리온 연합국이 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 평의회를 카스틸랴로 통합을 하여 두 왕국의 통합을 꾀했습니다. 이후 공문은 카스티야어로 작성됐고 레옹 어, 바스크어, 포르투칼어, 갈리시아어가 서서히 지배되기 시작했다.

 

트리스타마라 왕가

왕위 계승 전쟁

알폰소 11세기의 사후, 2명의 페드로 공과 엔리케 공 사이에 카스티리케의 왕위를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처음에 페드로는 알폰소 1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그 사생아 엔리케의 트라 스타 마라 후작이 그에게 반항하였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와 뭉쳐 엔리케를 추방했다. 그러나 페드로가 에드워드에게 약속한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았을 때, 에드워드는 카스틸리케를 떠났고 프랑스로 도망친 엔리케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카스틸리케로 돌아갔다. 페드로는 1369년 몬티로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엔리케 2세가 즉위했다.

1371년 에드워드 왕자의 형인 랭커스터 제1공 건의 존이 페드로의 딸 콘스탄스와 결혼하였다. 1386년 코트 왕 요한은 아내 콘스탄스를 카스틸랴 왕비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며 카스틸랴 시를 점령하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었다.

그의 뒤를 이은 후안 1세는 곤트 요한과 합의해 아들 엔리케 3세를 요한의 딸 케서린과 결혼시켰다. 이 결혼 때문에 왕위계승전쟁은 끝나고 트라 스타 마라 가문의 통치는 공고해졌다.

 

아라곤 연합왕국과의 관계

엔리케 3세가 죽은 후, 엔리케 3세의 동생인 은테셀라의 페르난도는 왕위를 거부하고 엔리케 3세의 바이슬린과 함께 엔리케 3세의 아들 후 안 2세의 섭정이 되었다. 1412년 카스페 협정 하에서 페르난도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섭정 캐서린이 죽자, 아직 14세였던 후 안 2세는 섭정을 최고 권력자인 아르바이트로 그 누나에게 맡겼다. 이 무렵 카스틸레와 가톨릭교회는 카 스틸 레의 궁정에 영향력을 확대한 아르곤의 군주들과 관련된 대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아르바이트로 그 누나는 소그이족과 연합하여 아라곤 왕자들과 싸운 뒤 이들을 카스틸랴에서 몰아냈다.

 

제 2차 왕위 계승 전쟁

 

엔리케 4세는 아버지 후 안 2세의 전쟁으로 멸망한 귀족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내 후이나 여왕에 의해서 태어난 후이나 라 베르툴라네하 공주가 카스틸랴의 귀족 베르트랑 대 라 쿠바 왕과 볼륜으로 태어났따는 소문이 파다했다.

귀족들은 후이나 공주의 왕위계승과 왕의 이복형제인 아스투라아스 공 알폰소의 후계자가 되라고 요구했다. 알폰소가 사고로 사망한 후, 이북동생 이사벨 1세가 상속인이 되었다.

 

가톨릭 군주

169년 이사벨 1세와 알라곤 왕세자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틸랴조 발라드리그에서 결혼하였다. 1479년 페르난도 2세가 알라곤의 왕위에 오르자 알라곤과 카스틸랴는 임시동맹을 맺었다. 교황은 그들에게 천주교 군주의 칭호를 내렸다.

앙리케 4세가 이복동생 이사벨을 후계자로 내세웠을 때, 그는 선택한 귀족과 결혼할 것을 제외했다. 알라곤 대신 포르투갈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싶어 했던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왕위 계승권은 페르난도와의 결혼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딸 혀안나 라 베르툴란하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1474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했을 때, 이사벨과 후 나의 지지자들 사이에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이사벨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스틸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결혼에서 2명은 왕은 '카스틸랴완,레오,알라곤,시칠리아' 로 불렀는데 이사벨은 카스틸랴 연합왕국을 페르난도는 알라곤 연합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연합국 두 왕국의 통치기관도 따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카스티유는 알라곤보다 3배나 많은 영토와 4배나 더 많은 인구를 가지고있어 알라곤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레콘키스타의 결과, 카스틸랴 귀족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의 군주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ㅜ이해 지역 치안조직인 성형제단을 설립하였다. 또한, 사적 전투를 금지하고 레콘키스타가 휙득한 신 영토 총독의 권한을 축소했다.

국왕에 의해 임명된 대표자가 각 도시에 파견되어 시의 행정을 감독했다. 두 왕은 1487년부터 1497년 사이에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했다. 1492년 1월 2일 이슬람교 마지막 도시 그라나다가 점령당하자 알람브라 궁전에 입성하였고, 레콘키스타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두 왕의 도움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고 신세계 정복을 시작하였다.

 

제국과 위기

후아나 1세

 

1504년에 이사벨이 사망하고, 딸 후 나가 카스틸리아 왕국을 계승했다. 후 나는 정신병에 걸려 있었고 별명은 크레이지 후아나 로커였다. 이사벨 씨는 후 나씨가 책임을 다했을 때를 대비해 그의 아버지 페르난도를 생전에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후 나의 남편 오스트리아의 펠리페 왕자는 카스틸랴의 귀족들이 의지하고 있었으나 후 나와는 사이가 나빴다. 페르난도는 카스틸랴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섭정 권한을 포기해야만 했다.

1506년 빌라 파 피려고 합의를 얻어 페르난도는 아르곤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펠리페는 아내 후아나와 함께 카스틸랴를 통치했따. 신세계에 대한 페르난도의 권한도 펠리페와 후 아나에 넘어가고 수입의 절반이 포기됐다.

1507년에 펠리페가 죽었을 때 페르난도는 섭정으로서 카스틸랴로 돌아왔다. 1510년 후 나의 정신질환은 악화하여 톨데실라스의 수도원에 갇혔다. 1512년 아르곤과 카스틸랴는 동맹을 맺고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여 병합하였따. 피레네 산맥의 남부는 카스틸랴의 영지에 합병되었다.